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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07월26일 제620호
대원군이 노무현보다 나은 이유
무작정 열어젖히면 된다는 한미 FTA 추진파의 ‘쇄국망국론’에 답한다 … 개화파의 대표격인 김옥균이 왜 대원군을
구하려 했는지 생각해보라
▣ 한홍구/ 성공회대 교양학부 교수
한미 FTA 문제를 둘러싸고 찬반 논란이 뜨겁다. 정부를 비롯해 한미 FTA에 목을 건 사람들이 즐겨 내세우는 주장이 쇄국론이다.
노무현 대통령부터 “개방하고 교류했던 나라는 망한 나라도 있고 흥한 나라도 있지만, 개방 않고 교류하지 않은 나라 중에는 흥한 나라가 없다”고
‘쇄국망국론’을 폈다고 한다. 노대통령은 지난 6월12일 인터넷 포털 사이트 대표들과 만난 자리에서 “대통령이 되기 전까지 대원군의 쇄국이
우리나라를 망하게 만드는 데 얼마만큼 기여했는지를 실제 잘 몰랐다”면서 “과단성 있는 쇄신정치가 통쾌하게만 보였지, 그것이 우리를 망치는 데
얼마만큼 기여했는지 정치를 한창 할 때까지 그 점에 대해서 판단이 잘 없었다”며 역사의 인과관계에 대한 정확한 시각의 중요성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개화는 자주요 독립이었다
진보 진영의 많은 논객들은 한미 FTA 반대론을 쇄국론으로 몰아붙이는 것을 ‘수준 이하’의 주장이라며 제쳐두고 지나간다. 사실 나도
그러고 싶지만 역사 공부가 업이고, 또 이 뜬금없는 쇄국망국론이 일반인에게 나름대로 먹혀들어가고 있는 것 같아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다. 한때
노무현의 열성적인 지지자였다가 현재 반FTA의 선봉에 서 있는 정태인은 한미 FTA 반대론자들이 노무현 대통령을 이완용이나 박제순에 비유하는 건
“아무리 봐도 지나친 감이 있다”며, “특히 노 대통령은 그의 지칠 줄 모르는 개혁 의지를 생각해보면 김옥균에 비유해야 더 잘 어울린다”고까지
주장한다.
△ 대원군의 쇄국정책이 잘한 거냐고 굳이 묻는다면, 지금처럼
대책 없이 문 열어주는 것보다는 백번 잘한 일이라고 말하고 싶
은 것은 심술이 나서일까? (사진/ 한겨레)
21세기의 벽두를 살아가는 ‘개화파’들은 한미 FTA에 반대하거나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을 쇄국정책을 편 수구파로 몰고 있다. 그런데 당시 개화파의 대표 격인 김옥균이 정작 쇄국정책의 집행자인 대원군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있었는지에는 좀더 깊이 있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역사는 단순하지 않기 때문이다. 1884년 김옥균 일파가 궁정 쿠데타인 갑신정변을 감행했을 때 그들이 내건 14개조의 정강에서 제1항은 “대원군을 곧 모셔오도록 할 것”이었다. 당시의 복잡한 상황은 좀 설명이 필요하다. 쇄국정책을 강력히 실시해온 대원군은 위정척사파의 대표 격인 최익현의 탄핵을 받고 1873년 물러나게 되고, 명성황후의 일족인 민씨를 중심으로 한 정권이 들어서게 되어 대외통상을 위한 단서가 열리게 되었고, 마침내 1876년 강제적인 문호 개방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개항 이후의 정치적·경제적·심리적 동요와 민씨 정권의 부패와 무능 속에서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 대원군은 근 10년 만에 정권을 잡게 되었는데, 대원군의 복귀는 조선의 문호를 군사력을 동원해 억지로 열어젖힌 일본에 큰 위협이 되었고, 일본은 출병을 준비했다. 일본의 출병 소동에 자극을 받은 청은 선수를 쳐서 “종주국으로서 속방을 보호한다”는 명목을 내걸고 조선에 군대를 파병했다. 조선왕조 개창 이래 500년 가까이 지속돼온 ‘조공(朝貢)’ 체제에서 중국이 직접 군대를 보내 조선의 내정에 간섭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청군은 민씨 정권 요인들의 요청에 따라 대원군을 임오군란의 책임자로 납치해 중국으로 끌고 갔다.
일본 쪽의 한 기록(<복택유길전>(福澤諭吉傳))에 의하면 김옥균은 “개인적으로는 대원군과 원수에 가까운 사이였음에도 조선 자주의 권(權)이 이미 상실되었다고 비통함을 금치 못하였으며, 죽음으로써 자국의 자주권을 회복해야 되겠다고 결심하였다”고 한다. 일본인들은 정치적으로 대립관계에 있던 쇄국의 화신 대원군이 제거되면 당연히 기뻐할 줄 알았던 김옥균 일파가 대원군 납치에 격분해하는 것을 보고 이들을 표리부동하고 믿을 수 없는 인간들로 생각했다. 김옥균은 개화에 목숨을 걸었지만, 그들에게 개화란 단순히 문을 열어젖히는 것이 아니라 자주요 독립이었다. 그러니 조선을 집어삼키기 위해 개화를 내세운 일본 제국주의자들과 뱃속이 맞을 수 없었던 것이다. 우리 독립운동가들을 이념에 따라 일렬로 세운다면 오른쪽 맨 끝에서 기준 잡으실 백범 김구가 끝내 세계 반공의 대부 미국으로부터 배척받은 것과 같은 이치였다.
김옥균이 “대원군을 곧 모셔오도록 할 것”이라고 한 것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였다. 이광린 교수의 표현을 빌리면 김옥균 등은 “대원군이야말로 쇄국에 대한 생각만 바꾸면 훌륭한 지도자가 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김옥균 등을 키워낸 박규수도 마찬가지 생각이었다. 고종의 리더십에 실망한 박규수는 고종이 군주로서의 리더십을 키우는 것보다는 쇄국과 개화에 대한 대원군의 견해를 바꾸는 것이 더 쉬울 것이라 생각했다. 1866년 제너럴 셔먼호를 불태울 때의 평양감사가 바로 박규수였다. 그런 의미에서 박규수는 쇄국정책에서 매우 상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지만, 그의 사랑방은 개화파들의 정신적 고향이기도 했다. 개화파들의 고뇌가 잘 들어나 있는 <근세조선정감>에도 대원군 같은 사람이 있었기에 쇄국이 가능하기도 했지만, 대원군이 아니면, 즉 대원군 같은 과단성이 없다면 뒤에 쇄국에서 개화로 나아가기를 바랄 수 없다고 쓰여있다. 어쩌면 김옥균 자신이 직접 썼을지도 모른다고 추정되는 <흥선대원군략전>은 대원군의 군제개혁과 군비확충 등 국방개혁을 높이 평가했다.
김옥균과 동학혁명군의 결합?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한 한미 FTA 추진론자들이 입에 달고 다니는 “개방하고 교류했던 나라는 망한 나라도 있고 흥한 나라도 있지만,
개방 않고 교류하지 않은 나라 중에는 흥한 나라가 없다”는 말에는 나도 전적으로 동감한다. 문 걸어잠그고 있으면 잘될 수 없다. 그런데 금방
들어먹지는 않는다.
△ 고종보다 흥선대원군이 낫다고 생각한 김옥균에게 개화는 자주요 독립이었다. 김옥균
의 암살 장면을 그린 그림.(사진/ 한겨레)
개방하고 교류한 나라 중에는 망한 나라도 있고 흥한 나라도 있다는 것은 전적으로 맞는 말이지만, 지금 우리가 걱정하는 것은 이렇게 열면 금방 쫄딱 망한다는 점이다. 김옥균이 오죽하면 대원군을 업으려 했겠는가? 김옥균은 민씨 정권을 사대수구당으로 몰아붙였지만, 김윤식·어윤중 등 청의 개입과 대원군의 납치를 요청한 인물들은 온건개화파 내지는 대외통상파였다. 이들이 주장한 ‘동도서기’(東道西器)는 아름다운 말이지만, 실제 이들 방식으로 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프로젝트는 아니었다. 서구의 과학기술을 도입하려면 서구의 과학기술이 뿌리내릴 수 있는 사회를 같이 만들어야 했다. 과학기술자들이 천시받는 사회, 엘리트의 절대 다수가 ‘공자 왈 맹자 왈’을 외어야 하는 사회에서 기계 몇 점 들여온다고 ‘서기’가 잘 돌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문은 열었으되 시간은 그렇게 흘러버린 것이다.
대원군의 쇄국정책 때문에 나라가 망했다며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찬양하는 사람들은 메이지유신을 이끈 사무라이들의 어떤 사고방식과 물적 토대를 갖고 있었는지를 생각해보아야 한다. 우리가 쇄국을 하는 동안 일본은 난학(蘭學)을 통해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서 메이지유신이 가능했는가? 너무 단순한 해석이다. 메이지유신을 이끈 사무라이들이 집권하기까지 사용한 ‘존왕양이’(尊王攘夷)의 언사는 대원군의 척화비나 위정척사파의 말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다. 중국의 신사(紳士), 조선의 양반(兩班)에 비해 일본의 사무라이들은 물질적으로 가진 것이 없었다. 사무라이들은 전통사회의 엘리트였지만, 중국의 신사나 조선의 양반과는 달리 토지를 소유하지 않았다. 생각을 바꿨을 때 자기의 발목을 잡아버리는 기득권이 그만큼 적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에게 부여된 특권을 타파했다.
대원군이 정권을 실각한 것은 1873년으로, 1867년의 메이지유신과 시간상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일본보다 조금 늦긴 했지만, 마감을 넘긴 것은 아니었다. 1873년 대원군의 실각에서부터, 또는 1876년의 개항으로부터 나라를 일본에 완전히 빼앗기는 1910년까지는 한 세대가 넘는 기간으로 한 학기 강의를 해도 다 끝내지 못할 만큼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난 시기였다. 갑신정변도 있고, 동학농민운동도 있고, 갑오개혁도 있고, 독립협회도 있고, 의병전쟁도 있고, 광무개혁도 있고, 애국계몽운동도 있었다. 근본적인 개혁 대신 땜빵으로 일관한 민씨 정권도 있었고, 결정적으로 망해가는 나라를 팔아 잡수신 친일파들도 있었다. 요컨대 대원군 한 사람에게 쇄국이란 이름으로 ‘독박’ 씌워도 될 만큼 역사란 게 간단치는 않다. 대원군의 쇄국정책이 잘한 거냐고 굳이 묻는다면, 지금처럼 대책 없이 문 열어주는 것보다는 백번 잘한 일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은 내가 심술이 나서일까?
정태인의 글을 보니 정부 쪽 사람들 중에 정말 엉뚱하게 “신미양요 때 미국과 잘 협상했더라면 우리는 이미 선진국이 되었을 것”이란 말을 버젓이 늘어놓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다. 정태인은 앞서 얘기한 대로 노무현 대통령을 김옥균에 비교하면서 한미 FTA 반대론자들은 동학혁명군에 가까운 느낌이라며, 기왕에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해보려면 김옥균과 동학혁명군의 결합 같은 좀 멋진 그림을 꿈꾸지 하필이면 신미양요 타령이냐고 꾸짖은 바 있다. 참으로 슬픈 이야기다. 왜냐하면 김옥균과 동학혁명군은 만나지 못했어도, 노무현과 젊은 영화인들은 2002년 대통령 선거와 2004년에 이미 뜨겁게 만났었는데, 2006년에는 정반대의 방향에서 대치하고 있다. 어디 영화인뿐인가!
교훈 얻으려면 방곡령 사건을 보라
김옥균과 동학혁명군의 결합, 또는 김옥균과 대원군의 결합은 이루어지지 않아 조선이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더니, 21세기의 벽두에는
참으로 고약하고 괴이한 결합이 ‘낯선 식민지’(한미 FTA 반대론의 기수 이해영 교수의 책 제목이다)를 불러오고 있다. 김옥균이 대원군에게서
가장 높이 산 것은 역시 과단성이었을 것이다.
△ 일본의 메이지유신을 찬양하는 사람들은 사무라이들의
사고방식과 물적 토대가 어떻게 다른지를 보아야 한다.
1872년에 찍은 메이지 일왕의 사진.(사진/ 한겨레)
그런데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때 마땅히 책임을 지고 개혁됐어야 할 관료집단과 재벌들이 신자유주의의 깃발 아래 살아남아 노무현을 등에 업고 정신없이 한미 FTA를 몰아붙이고 있다. 19세기 말의 개국론자 김옥균은 대원군의 과단성을 사서 자주 독립을 강화할 기회를 갖지 못했는데, 21세기의 신자유주의자들은 노무현의 화끈함을 사서 ‘낯선 식민지’로 우리를 몰아간다.
한미 FTA의 문제점이야 내가 여기서 새삼 지적할 필요도 없겠지만, 역사의 관점에서 꼭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문제가 ‘투자자-국가소송’ 제도다. 미국인(또는 법인) 투자자가 한국의 공공정책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권리를 부여한다는 것인데, 이런 이의를 한국의 사법기구에 제기하는 것이라면야 당연한 것이지만, 문제는 한미 FTA가 이루어지면 “미국 투자자가 한국의 사법심사 절차 대신, 한국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를 국제중재기관(Tribunal)에 회부할 권한을 부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민변에 따르면 이렇게 될 경우, “한국의 중앙정부, 국회, 지방자치단체의 정책이 미국인 투자자의 투자 활동에 영향을 미칠 공공정책의 경우, 미국 투자자의 국제 중재 회부에 따라, 한국의 행정부와 입법부는 한국의 사법심사를 통해 그 정책의 적법성을 확인할 기회조차 가질 수 없게” 되며, “한국 사법부의 입장에서는 그 정책이 정당한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권한을 상실하는 것”이다. 미국이 멕시코와 캐나다 등과 체결한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11조에서 이미 현실로 나타나는 문제다.
정부 쪽 사람들이 정말 한미 FTA와 관련해 역사에서 교훈을 얻고자 한다면, 엉뚱하게 쇄국-개화 논쟁을 할 것이 아니라 방곡령 사건을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이 문제는 청일전쟁 전야인 1889년부터 1893년까지 조선의 외무대신 격인 독판교섭통상사무(督判交涉通商事務)를 3번, 주한 일본공사를 3번 갈아치운 사건으로, 투자자-국가소송 제도와 관련해서 심각한 교훈을 준다. 1876년 개항 이후 일본은 한국을 식량 공급지로 삼고자 했기 때문에 쌀과 콩 등 미곡의 일본으로의 유출이 크게 증가했고, 이는 국내의 미곡 부족과 그에 따른 곡가 상승, 국내 유통시장의 붕괴 등 여러 가지 문제를 낳았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883년 7월 ‘조일 통상장정’(1876년 체결)을 개정해 일정 지역에서 곡물의 유출을 금하는 방곡령을 실시할 수 있도록 하여 법적 근거를 마련했는데, 유일한 단서 조항은 조선 정부 또는 지방관이 방곡령 실시 1개월 전에 사전 예고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어디까지나 예고이지 외국의 동의를 요하는 사항은 아니었다.
IMF와 탄핵, 개혁 기회를 날리다
방곡령은 1884년부터 1904년까지 모두 100여 회 단행됐는데, 그중 가장 말썽이 난 것이 1889년 함경감사 조병식이 선포한
방곡령이었다. 조병식은 단순한 지방관이 아니고, 함경감사로 부임하기 이전에 독판교섭통상사무(외무대신)을 지낸 인물로서 독판 재임 당시 경상도
지방의 방곡령 사건을 처리한 경험을 갖고 있었다.
△ 김대중 정권이 위기 상황에서 강요받은 신자유주의는 이 땅에 든든한 뿌리를 내렸다.
1998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자택을 방문한 캉드쉬 전 IMF 총재. (사진/ 한겨레)
그는 1889년 10월 관내의 식량 부족을 이유로 방곡령을 준비하면서 통상장정 37조의 규정에 의거하여 시행 1개월 전에 외국공사관에 통보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통리아문 쪽의 실수로 조병식이 예정한 10월24일 1개월 전에 통보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에 통리아문은 일방적으로 시행일을 1개월 늦춰 11월22일 이후로 하여 일본 쪽에 통보했는데, 정작 이 사실을 함경도의 조병식에게는 통보하지 않았다.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한 조병식은 예정대로 10월24일부터 일본 상인들의 곡물 매매와 운반을 금지했다. 일본은 조병식의 ‘죄’를 물어 면직시킬 것을 요구했고, 민씨 정권은 일본의 압력에 굴복해 조병식을 3개월 감봉에 처했다가 결국 강원감사로 좌천성 인사를 단행했다. 그럼에도 일본은 배상을 요구했고, 조선 정부는 일본 상인들이 곡물 투기에서 입은 손실과 미래의 수익까지 포함된 배상 요구에 굴복했다.
방곡령은 조선 정부의 주권에 관한 문제였다. 배상 문제가 제기된 조병식의 방곡령 등 4건의 사례는 김경태 교수에 따르면 조선 쪽에도 통고 수속상의 잘못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조선 정부는 일본의 강한 압력에 방곡령을 철회했을 뿐 아니라, 방곡을 시행한 지방관을 해임하고 배상까지 해주었던 것이다. 오히려 일본 신문이 “독립국이 국내에 방곡령을 발포하는 것은 결코 문책할 일이 아니며” 러시아도 흉작으로 곡물 수출을 금지하고 있다고 지적할 정도였다. 일본 상인들의 배상 요구에 대해서도 외무성의 방곡령 사건 담당 이시이는 “조선은 국내에 방곡령을 발할 권리가 있으므로, 이에 따라 생기는 손해는 법률상 자연의 결과로 이는 배상의 책임이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배상은 이루어졌다.
방곡령 때는 조약에 명기된 권리를 지키지 못한 것인데, 한미 FTA 1차 협상에서 합의한 투자자-국가소송 제도는 아예 퍼주기로 작심을 하고 그렇게 협상(?)한 것이라 할 수밖에 없다. 누구는 한미 FTA가 체결되면 IMF 사태가 7개 분야에서 터지는 것이라고 말하고, 누구는 제2의 한일합방이 이뤄지는 꼴이라고 말한다. 후보 시절 “반미면 좀 어때?”를 외치던 노무현 대통령 밑에서 도대체 어쩌다가 이런 일이 벌어지는 지경이 되었을까?
IMF 사태는 위기였지만 기회이기도 했다. 그런데 김대중 정권은 이를 개혁의 기회로 보지 않고, 위기 탈출만 모색해 신용카드 남발 등 인위적 경기 부양을 통해 조기 졸업을 선언했다. IMF 위기를 불러온 재벌과 관료는 살아남았을 뿐 아니라, 신자유주의라는 새로운 무기를 통해 시장만능주의와 세계화라는 이데올로기의 전도사로 부활했다. 김대중 정권이 위기 상황에서 강요받은 미국식 신자유주의는 이 땅에 든든한 뿌리를 내렸고, 노무현 정권이 반환점을 돌면서 정권 내에서 부족한 대로 균형을 잡아주던 인물들이 사라진 뒤 드디어 노무현을 지배하면서 한미 FTA를 추진하고 있다. IMF와 탄핵 사태라는 두 차례의 진정한 개혁 기회를 허망하게 날려보낸 한국 사회는 지금 신자유주의의 공세 속에 ‘낯선 식민지’로 가는 길목에 서 있다.
김대중이 IMF 사태라는 개혁 기회를 날렸다 하더라도, 그는 6·15 공동선언을 이끌어냈고, 또 노무현 정권이 들어설 수 있는 토양을 일궈냈다. 그러면 노무현 정권은? 대북송금 특검으로 6·15 공동선언의 성과를 이어나가지 못하게 손발을 묶고, 앞장서서 이라크에 파병하고, 그리고 한미 FTA에 올인하고 있다. 김대중은 누가 뭐라고 해도 6·15 공동선언을 만든 대통령으로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그가 IMF 사태 직후의 기회를 상실한 것은 참 아깝지만 다음 주자가 얼마든지 만회할 수 있는 문제다.
그가 과거청산의 법정에 나오지 않기를…
노무현은 어떻게 역사에 기록될 것인가? 그가 남은 임기 중에 사회 양극화를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아닐 것이요, 하루아침에 남북
통일이 이루어지지도 않을 것이다. 노무현의 남은 임기 중에 그가 모든 사람을 헷갈리게 만든 ‘대연정’이 이루어지지도 않을 것이요, 지역 감정이
해소되는 일도 없을 것이다. 대학입시 문제가 해결되거나 부동산 문제가 잡힐까? 나는 노무현 대통령이 우리 역사를 다시금 ‘낯선 식민지’로
이끌어간 대통령으로 기록되지 않기를 바란다. 대신 나는 노무현이 과거 청산을 한 대통령으로 기억되기를 바란다. 그것만 해도 우리 역사에 5년
임기의 대통령이 남길 수 있는 엄청난 업적이다. 그리고 요즘 신자유주의식으로 이야기하면 노무현이 가장 경쟁력 있는 분야가 바로 과거 청산
아니겠는가? 과거 청산 작업에 누구보다 깊숙이 발을 담그고 느낀 것이지만, 아무리 과거 청산을 잘한다 해도 처음부터 청산 대상이 될 나쁜 일을
하지 않는 것에는 새까맣게 미치지 못한다. 노무현이 과거 청산을 잘한 대통령으로 남아야지, 한미 FTA가 이대로 실현되면 우리 후손이 반드시 열
과거 청산의 어두운 법정에 그가 주범으로 불려나오는 모습은 상상도 하기 싫다. 정말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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