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FTA, 김현종-노무현의 '비밀작품' |
|
[한미FTA 역사쓰기 4] 김현종의 '감언이설'에
노무현대통령 '감전'되다 |
|
김영국 |
|
2004.11월 칠레 산티아고, '한미FTA 실무적 검토 시작' 합의
한·미
양국이 FTA 추진 가능성에 대해 처음 정식으로 의견을 교환한 것은 2004년 11월, 칠레 산티아고에서 개최된 한·미통상장관회담에서다. 이때
양측은 FTA 추진과 관련해 정부 차원에서 실무적 검토를 해 나가기로 합의했다.
한국의 김현종 무역대표는 특히 미
무역대표부(USTR)의 당시 대표였던 로버트 졸릭(Robert Zoellick)같은 미국의 핵심적인 정책입안자들에게 한미FTA 관련
발표(프리젠테이션)을 해 깊은 인상을 주었다.
한마디로 미국 고위관료들의 귀가 솔깃하도록 '사바사바'를 잘했다는 이야기다.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은 2004년 한.일 FTA 협상이 농업 분야 시장 개방 문제로 교착 상태에 빠지자 거대 경제권인 미국과
FTA를 해야 한다는 아이디어를 마련한 장본인이다. 이후 대통령과 수차례 독대한 끝에 '결심'을 받아낸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한미 FTA를 통해 낡은 일본형 경제 시스템을 버리고 미국형으로 개조하는 게 우리의 살길"이라고 주장해 왔다. 이 논리는 이후 노무현 대통령이
한미FTA 강행 이유를 성명할 때도 단골 메뉴로 등장했다.
일각에서 주장하고 있는 대로, 훗날 한미FTA가 나라를 일제에 넘긴
'제2의 을사늑약'처럼 평가된다면, '제2의 이완용'은 단연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 몫이 될 것이다.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이 밝힌 '한미FTA 추진 과정'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은
한미FTA 협상 공식 개시선언이 있고난 후 2006년 2월 8일자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한미FTA 추진 과정에 대한 의미있는 증언들을 쏟아냈다.
물론 스크린쿼터 문제 등 일부는 나중에 사실과 다른 것으로 드러났지만, 한미FTA 추진 과정에서 김현종의 은밀한 활약과 노무현-김현종 둘 사이에
있었던 내막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증언도 많았다.
그가 밝힌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2004년 11월
칠레 아태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 때 로버트 졸릭 당시 USTR 대표가 한.미 FTA에 대한 예비협의를 하자는 제의를 먼저 해왔다.
지난해(2005년) 2월부터 세 차례에 걸친 예비협의가 열렸고, 11월 경주에서 열린 한.미 정상회담 직후부터 본격적인 논의가 이뤄졌다.
사실 한.미 FTA에 대한 미국 여론을 좋게 만들기 위해 지난해(2005년) 7월과 9월 두 차례나 미 의회를 방문해 15명의
의원을 잇따라 만났다.
한국은 미국과 함께 베트남부터 이라크까지 같이 간 나라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이제 경제동맹이 필요하다고
설득했다. 한국전 참전 경험이 있는 의원들을 따로 찾아가 협조를 구하기도 했고, 산업계 대표들을 만나 한.미 FTA가 양국에 어떤 도움을 줄
것인지 구체적인 통계숫자를 가지고 일일이 설명하기도 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미국 측의 반응이 좋아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거대
경제권인 미국과의 FTA는 대외 무역의존도가 70%에 달하는 우리에겐 수출과 성장을 위한 '보이지 않는 초고속 인프라(invisible
high-speed infra)'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그동안 택했던 일본식 경제성장 모델로는 한계에 달했다. 이제 새로운
방식을 찾아야 할 때다. 이를 위해 가장 필요한 게 개혁과 개방이다.
지난해 가을(2005년 9월)
대통령의 해외순방을 수행하면서 '선진형 통상국가로 나가기 위해선 한.미 FTA가 필요하다. 협상 과정에서 노력하면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라고
보고하자 대통령은 이를 경청한 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라면 추진하자'고 말했다.
대통령이 국민소득 3만 달러 시대로 가기 위해선
한.미 FTA가 꼭 필요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국가 리더십 차원에서 이를 추진하고 있기 때문에 국내 협상도 잘될 것으로 본다. 부처 간 협의에서도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다.
스크린 쿼터는 이미 한.미 통상현안으로 드러나 있었던 문제다. 이번에 FTA와 연계해 해결한
것은 아니다.
협상에는 타이밍이 중요하다. 미국 국내법인 무역촉진법에 따라 FTA 체결권한이 있는 의회가 행정부에 권한을 위임한
내년 7월 이전에 협상이 타결돼야 한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인수위 시절 노 당선자에게 통상현안에 대해 프레젠테이션을 한 적이
있다. 며칠 후 '함께 일하자'는 제의가 왔다.}}
'제2의 개항'이라 불리며 국가적 명운이 걸린
한미FTA. 그러나 한미FTA는 이처럼 정부의 공식적인 의사결정 시스템에 의한 것이 아니라 김현종이라는 비경제인 출신 외교관리와 그 한 명의
감언이설에 귀가 솔깃한 노무현 대통령, 이 둘만의 결심으로 은밀하게 추진되기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당시 양국 정부의
한미FTA 접근은 조심스럽고 신중했다. 실무 논의를 전후로 여러 소문이 나돌았을 때도 말을 아꼈다. 쇠고기 수입 협상, 스크린쿼터 문제 등이
걸림돌이 될 것이라는 관측만 있었을 뿐 협상의 진전 정도는 일체 공개되지 않았다. 그만큼 민감한 현안으로 받아들였다는 얘기다.
한미FTA, 김현종-노무현 둘만의 '은밀한 결심'으로
시작
어쨌든 2004년 말까지도 정부 공식 입장은 한미FTA에 관한한 '여전히 중장기 과제'였다.
MBC PD수첩이 입수한 정부 자료 즉 『FTA 추진현황 및 전망』이라는 외교통상부 통상교섭본부 명의의 2004년 12월 16일자
정부 문건(제3차 대외경제위원회 보고서)에 따르면 2004년 말까지만 해도 한미FTA는 분명 우선 순위가 아니었고 중장기 과제 중
하나였다.
실제 문건에 수록된 FTA 우선 순위에서 한미FTA는 중국보다도 후순위인 10위로 '맨 나중'이었다. (1.한.싱가포르
FTA, 2.한.일본 FTA, 3.한.EFTA FTA, 4.한.멕시코 FTA, 5.한.캐나다 FTA,...8.한.중 FTA, 9.한.중.일
FTA, 10.한.미 FTA)
*아래 [관련자료 및 보도기사] 리스트는 '제목을 클릭하면' 해당 문서 및 보도기사 전문을 볼 수
있음. *는 해당 문서나 기사
내용중 주목할 만한 대목을 발췌한 것임. *관련 기사나 문서는 '날짜 순'으로 배열하는 걸 대원칙으로 하되, 서로 밀접한 내용이거나
보충성 기사, 문서인 경우는 날짜와 상관없이 한데 묶어서 배치함. |
☞ [특종파일] 한·미 FTA 極秘 발진/ [한·미 FTA
합의 막전막후] 한·미 FTA 참여정부 새 승부처(월간중앙 1,2월호,
2005.12.19~2006.1.24)
☞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이 말하는 한·미 FTA
협상'(중앙일보,2006.2.8)
☞ 미국 의회조사국(CRS) 보고서 <한미 경제관계:
FTA를 위한 협력, 마찰, 전망(2006.2.9)>(프레시안,
2006.3.6)
☞ 한-미 ‘공식개시’ 서둔 이유는(한겨레,
2006.3.7) 미국 쪽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 추진에 초기부터 긍정적 관심을 보인 대표적 인물이 로버트 졸릭이라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워싱턴 외교가에서 ‘가속화된 헬싱키
프로세스 추진론자’로 불리는 그는 다이빙궈 중국 외교부 상무부부장과 미-중 고위대화에서 한반도 미래상과 관련해 큰 그림을 그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헬싱키 프로세스’란 동·서유럽의 ‘공존’을 목적으로 한 ‘유럽안보·협력회의 헬싱키 최종협약’ 체결(1975)을
비롯해 그 이후 소련 및 동유럽 사회주의권 붕괴에 이르는 모든 과정을 일컫는 말이다. 동서간 경제협력·정치대화·인권문제가 ‘3대 기둥’이다.
결국 한-미 자유무역협정 협상 개시는 경제영역에서 중국에 따라잡히지 않으려는 한국 정부와, 동아시아에서 중국의 영향력을 견제하려는 미국 정부의
‘동상이몽’ 속 이해일치인 셈이다.
☞ 한.미 양국 '한미FTA 협상대표' 비교 분석 -부산상고
야구팀과 뉴욕 양키즈의 시합(프레시안, 2006.3.22)
☞ 한미FTA 추진 주역들 면면 -노 대통령 '결심' 얻어낸 김현종 본부장이 주도(중앙일보,
2006.6.6)
☞ 한국 정부의 한미FTA 추진 과정, "한미FTA는 맨 나중"(MBC PD수첩 7.4일 방송분
녹취록-참정연, 2006.7.28)
☞ [한미FTA 2차협상] 졸속추진… 줄잇는 문제점(서울경제,
2006.7.9)) 2006년 2월 3일
한미FTA 출범을 앞두고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은 김중근 통상교섭조정관을 심하게 질책했다. 민간출신 전문가로 전격 발탁돼 자신 보다 나이가
7살이나 어린 김 본부장에게 김 조정관이 수모에 가까운 대접을 받은 이유는 한미FTA 출범 사실과 날짜를 누설한 장본인으로 지목됐기 때문이다.
김 조정관은 이후 한미FTA 협상에서도 철저히 배제됐다. FTA를 주도하는 통상교섭본부 관계자들이 "아는 사실도 모른다", "있던 일도
없었다"며 잡아 떼며 철저한 비밀주의를 유지하는 배경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사례다.
시민단체나 정치권, 학계 등에서 투명한 협상
과정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어도 정부의 비밀주의가 완화될 기미가 없어 한미FTA 협상 자체가 불신을 사는 일이 개선될 기미가 없는
것이다. 각종 여론조사를 보면 시간이 흐를수록 반대 여론이 많아지고 찬성 입장은 줄어드는 추세를 보이고 있는 것도 다 이 같은 사정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 정부 ‘FTA 전략’ 세우기나 한 건지…◆통상교섭본부의
독주(조선일보,
2006.7.11) |
한미
양국은 2005년 2월~4월까지 3차례에 걸쳐 '한미 FTA 사전 실무점검 협의'를 갖고 FTA의 세부계획, 이점, 위험성 등은 물론 한미
양국이 다른 나라들과 체결한 FTA의 목적과 세부조항 등에 대해 검토했다.
한·미 양국은 2005년 2월 3일 서울에서 제1차
한·미 FTA 사전 실무점검협의를 개최했다. 이후 3월 28~29일과 4월 28~29일 워싱턴에서 각각 2, 3차 사전 실무점검협의를 잇달아
열었다.
이 자리에는 이건태 외교통상부 지역통상국장을 수석대표로 외교통상부·재정경제부·산업자원부·농림부·정보통신부 관계자들이
번갈아 참여했다. 미국 측에서는 앤드루 퀸 무역대표부(USTR) 한국통상담당 자문관(1차), 애미 잭슨 USTR 한국 담당 부대표보(2차,
3차)를 수석대표로 USTR·국무부·상무부, 주한 미 대사관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1차 회의에서는 FTA 추진 절차 및 효과에
대해 논의했는데, FTA 추진시 발생할 문제점과 이에 대한 해결 방안에 대해 의견을 교환했다. 2차, 3차 회의에서는 구체적인 내용을 다뤘다.
양국이 제3국과 과거에 체결한 FTA 협정문을 놓고 협상의 주요 내용인 서비스·투자·금융·통신·전자상거래·경쟁·노동·환경·투명성
등에 관한 비교분석을 중심으로 논의를 진행했다. 또 실무협의를 추가로 수차례 개최한 후 통상장관회담에서 한·미 FTA 협상 출범 문제 등을
재논의하기로 합의했다. 사전점검회의에서는 한·미 FTA의 경제적 효과에 대한 양국 전문가들의 연구 결과를 청취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원론적 수준에 불과했다. 한·미 FTA 협의가 급물살을 타기 시작한 것은 2005년 9월. 노무현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이 전화 통화를 하면서부터다.
한편 2005년 한 해동안 모두 여섯 차례의 한ㆍ미 통상장관회담을 열어 FTA 협상 출범
가능성을 협의했다.
(한미FTA 역사 쓰기는 계속
이어집니다)
*필자는 대자보 편집위원, 참여민주주의와 생활정치연대 회원입니다. 한미FTA 관련자료를 더 보실 분들은 참정연
홈페이지를 방문하시길 바랍니다.
|
|
|
2006/08/01 [07:40]
ⓒ대자보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