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일 밤 11시, 민주노동당의 강기갑의원이 도포자락과 긴 턱수염을 휘날리며
인천공항에 내렸다. 한미 FTA 3차 협상이 진행된 시애틀에서 일주일간 원정투쟁을 마치고 돌아온 것. 12일 한국에 돌아온 다른 투쟁단원들보다
꼬박 하루 반나절을 늦은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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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항에 도착한 강기갑 의원.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도포자락과
수염이 그를 단번에 알아보게 했다. ⓒ민중의소리 정택용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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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늦었냐고 물어보니, 뉴욕과 워싱턴에 들러
민주노동당 지역위원회 사람들과 1차 협상 때부터 뜻을 함께 해준 미국 민주당의 쿠치니치 의원을 만나고 왔다고 했다. 게다가, 비행기 삯을
아끼려고 디트로이트와 도쿄를 거쳐 오느라 무려 30시간이 걸려서 늦었다고 했다.
원래
예정된 도착시간은 오후 9시 15분. 디트로이트에서 뜨는 비행기가 연착을 하는 바람에 예정된 시간을 두 시간 가까이 넘긴 11시에야 도착한
강기갑 의원과 인터뷰를 하려니, 미안한 마음이 앞섰다. “사실, 인터뷰를 해달라고 왔는데, 너무 피곤하실 것 같아서 내일 오전에 시간을 잡아
주시면 고맙겠습니다”라며 말을 건넸다.
원정투쟁단의 일정이 잠시 쉴 틈도 없었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고, 30시간이 넘는 여정과 시차까지 있을 터. 특히나 약속이 잡혀있던 인터뷰도 아니고 무작정 찾아간 것이었기 때문에 미안한
마음이 더 컸다. 한국에 도착했다는 안도감에 피곤함이 물밀듯이 밀려올 법 한데, 강 의원은 기자의 부탁을 매몰차게 거절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하고 가야지 무슨 소립니까. 괜찮습니다. 숙소로 갑시다. 내 얘기
다 해줄게.”
그는 차에 오르자마자 사천의 집으로 전화를 했다. “내다. 응. 지금
내려서 숙소로 가고 있다. 아(애)들은? 뜸은 계속 떠주고 있나?”라며 이것저것 묻는 강 의원은 너그럽고 인자한, 영락없는 우리네 아버지의
모습이다.
차 안에서라도 좀 쉬게 해줘야겠다 싶어 일부러 말도 안 건네고 조용히
있었던 기자를 질책이라도 하듯, 강 의원이 먼저 이야기를 시작했다. 인자한 우리네 아버지가 미국에 다녀온 이야기를 시작하면서는 이내 ‘쌀 개방
반대’를 목 놓아 외치던 때의 날카로운 눈매를 가진, ‘투쟁하는 국회의원’으로 바뀌어 있었다.
“미국, 참 땅덩이 넓습디다. 마치 신이 칼로 평평하게 깎아 놓은 것처럼... 그 사람들은 맘만 먹으면 그 놀고
있는 땅 갈아서 농사지으면 된다 아닙니까”라는 그의 말에 좁은 땅덩이에서 뼈 빠지게 고생하면서도 우리 농산물 지키겠다며 싸우고 있는 우리
‘농사꾼’들의 아픔이 그대로 묻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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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소에 도착하자마자, 그는 잠시 쉴 틈도 없이 시애틀에서의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민중의소리 정택용 기자 |
숙소에 도착해서 일주일간의 원정투쟁을 진행하며 있었던 일들, 들었던 생각들을 이야기하며 그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한다. 현지 정치인들과 노동자, 농민들이 연대를 해 줬던 이야기, 현지 교민들의 환대와 투쟁 결합, 언론의 주목 등을 이야기하며 기자까지 가슴
뿌듯하게 만들었던 강 의원.
국회의원의 기자회견을 막으려 마이크를 꺼 버렸던
외교통상부와, 도망만 다니던 김종훈 협상대표 이야기를 하면서는 그 때의 울분이 되살아나는지 수염을 파르르 떨며 흥분했다.
시애틀 협상장 주변을 돌며 삼보일배를 했던 일이 가장 기억난다는 강 의원. “우리가
지금 FTA 반대를 하는 것이 하늘의 소리요, 땅의 울림이라는 신념으로 하늘과 땅의 뜻이 이루어지라고 삼보일배를 했습니다. 이런 신념이 있었기
때문인지 일정이 빡빡했지만 하나도 피곤하지 않았어요”라는 강 의원의 말에 원인 모를 소름이 돋았다.
“역사에 아주 중요한 획을 그을 FTA를 우리 민중이 저지하겠다는 몸부림을 했다는 것, 이것 자체가 역사에 길이
남을 이번 투쟁의 성과입니다. 우리가 지금 FTA를 막지 못해도 누군가 이 역사적 발걸음을 발견하고, 다시 시작해 저항의 역사를 이어갈
것입니다. 불꽃이 되고, 촛불이 되어, 앞으로도 당당하게 반대 투쟁을 하자고 말하고 싶어요.”
새벽 1시를 훌쩍 넘긴 늦은 시간까지, 강 의원의 집에서 나눴던 시애틀 원정투쟁 현장의 생생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원정투쟁 기간 내내 잠시 짬도 없는 일정을 소화한
것으로 알고 있다. 힘들지는 않았나? 힘들다 생각하면 힘들지만, 워낙
우리 민중들에게는 중요한 일 아닌가. 정신적으로 ‘어떻게 해서든지 저지를 해야 하는데, 조금이나마 역할이 되었으면’ 하는 그런 의지를 가지고
가서 그런지 몰라도 힘들거나 하진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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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싸움 자체가 역사의 첫걸음이다" ⓒ민중의소리 정택용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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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차 협상 때 미국
민주당의 쿠치니치 의원을 만났는데, 이번에도 미국의 정치인들을 만났나? 만났다면 어떤 이야기들을 나눴나?
우선 5일 11시,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워싱턴 주 시애틀 지역의 짐
맥드마트라는 하원의원을 만났다. 무역에 관련된 일을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FTA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한국 민중들에게 이렇게 큰 피해를 주는 내용이라면 분명히 문제가 있다’고 하면서 부시의 패권정책에 대해서 강력한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6일에는 미국의 노동자들도 함께 반대전선을 펼친다 하니까 더 심각하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작년부터 미국과 일본, 한국의 의원단들이 외교모임을 해마다 하는데, 작년에는 열린우리당 두 명과 한나라당
한명이 참여했다며 거기에 참여를 하라고 했다. 내가 TO에 끼기 어려울거라 하니 11월이나 12월에 그 모임을 위해 한국에 오는데, 별도로
만나자고 하더라. 부시정부의 전쟁, 패권 문제를 결코 용남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 비정규직 문제, 농민의 몰락 등 상당히 오랜 시간동안
이야기를 했다.
같은 하원의원인 아담스미스 의원도 만났는데, 이 사람은 FTA에 직접
관여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직접 USTR에 관여하고 있다고 하는데 말은 많이 안 했다. 우리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한 번 더 확인하고 한
번 더 보고를 받겠다는 이야기 정도만 했다. 앞으로 교류를 계속 하자. 이 정도였다.
워싱턴 주의 주 의원과 시의원도 만났다. 3명을 만났는데, 그 사람들도 FTA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대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시민단체들과 간담회를 잡아주려고도 했는데 우리 쪽 시간이 안 돼서 못하기도 했다. 민주당 사람들이었다.
1차 협상 때 만났던 쿠치니치 의원은 이번에도 만났다. 10월에 미국 중간선거가
있다고 해서 11월경으로 토론회 일정 가안을 잡고 왔다. 한국의 국회의원들과 미국의 국회의원들 간의 토론회인데, 한국 국회의원들과 일정 논의를
할 것이다. 민주노동당과 한미FTA를 연구하는 국회의원 모임 위주로 해서 제안을 할 생각이다.
- 쿠치니치 의원은 어떤 사람인가?
쿠치니치 의원은 상당히 개혁적인 의원이며 반전, 반핵, 평화운동과 세계화 반대 운동도 적극적으로 하는 사람이라 미국
측에서는 자신이 그런 역할을 하겠다고 했다. 노동자나 농민들도 토론을 원해서 미국에 온다면 미국의 노동자, 농민들과의 토론회를 열어주겠다는
제안도 했다.
쿠치니치 의원에게 내가 ‘하루에 10 만 명의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는데, 이는 식량의 분배와 생산, 문제이며, 이런 인류의 대 범죄 행위의 중심에 미국이 서 있다’고 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를
하더라. “이 모든 것이 인권의 문제다. 우리 민중들이 막아내야 한다”고. 이런 답을 하면서 앞으로 교류를 하자고 해서 그러자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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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함께 한 연대투쟁과, FTA를 저지하겠다는
신념때문에 힘든줄도 몰랐다는 강 의원 ⓒ민중의소리 정택용 기자 |
- 현지에서 미국의 노동자, 농민들과 교민들이 많이 연대활동을 했다고 들었다. 그
이야기를 좀 들려달라. 미국의 반전반핵 운동을 하는 사람들, 인권단체,
소농들, 노조, ILO등에서 많이 우리 투쟁에 결합했다. 민주노동당 당원들이 중심이 되고 신자유주의 반대운동을 하는 젊은 사람들이 모인
재미지역위원회에서도 상당히 적극적으로 우리 투쟁에 결합을 했다.
개막집회를 할 때는
미국 쪽의 노동자들 7~800명과 시민단체들 2~300여명이 결합해서 함께 집회를 했다. 거리를 오가며 집회를 진행했고, 공원에서 협상장까지
행진을 했다. 협상장을 둘러싸고 호루라기도 불고, 장구 치면서 둘러싸기도 해서 아마 안에서 협상을 하는데 시끄러워서 지장이 됐을 것이다. 그런
정도로 규모 있게 집회를 진행했다.
3일째 되는 날 아침에는 농민대표단이 기자회견을
하는데, 미국의 소농, 가족농의 대표자들이 나와서 함께 기자회견을 하고 성명서도 발표했다. 노동자들도 연대투쟁을 했는데, 민주노총과 미국의 노조
노동자들이 기자회견을 진행했다. 민주노동당 재미위원회도 우리 노동자, 농민들이 입장을 발표하는 개막기자회견에 함께 했다.
- 그동안 광우병 소고기 수입재개를 막으려고 노력을
많이 한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에 있는 동안, 정부의 졸속 추진으로 소고기 수입이 재개됐다.
개막 기자회견을 하는 날, 한국에서 광우병 관련해서 마지막 승인절차를
회의로 결정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최규성, 홍우표 의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FTA 3차협상과 무관하지 않다, 왜 승인을 해줘야 하나"라고,
"미국의 도축장 실태를 점검했으면 그 결과를 농해수위에 보고하고, 상임위와 공청회를 통해서 의견을 들은 후에 결정해야 하지 않겠나"라고
이야기했다. “행정부가 자기들 마음대로 승인서 발급해 버리고 그러면 어떡하나, 어떻게든지 발목 잡아서 문제를 제기해 달라”고 했더니 그 날
상임위는 안 하고 조찬간담회에서 보고만 한 후 통과시켰다고 하더라.
그 얘기를
듣고서는 여기서 광우병과 관련한 기자회견을 해야 한다고 생각을 했다. 마침, 광우병 소고기 수입에 반대하는 국회의원 36명의 서명도 받아서 부시
대통령에게 보내는 서한도 가지고 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가 좀 생겨서 개막 기자회견에서 못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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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우병 쇠고기 수입 재개를 막지 못한 이야기를 하던 대목에서 강
의원은 흥분을 참지 못했다. ⓒ민중의소리 정택용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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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협상장 브리핑 룸에서 기자회견을 하게 된 건가? 외교통상부가 기자회견을 막았다고 하던데.
개막 기자회견 당시에 내가 서한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간단하게 입장 발표만 하고, 기자들이 모여 있는
협상단 숙소에서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그래서 그 날 오전, 브리핑룸을 이용하러 가겠다고 전화를 했다. 그 이후 외교 통상부에서 보좌관에게
오지 말라고 전화를 했다고 한다.
입법부의 일원이, 행정부가 빌려놓은 기자회견장을
이용해서 브리핑을 하겠다는데 그걸 못 오게 하는 것이 말이나 되는 소리냐 싶어서, 다시 전화할 가치도 없다고 생각을 했다. 그랬더니 한 차례 또
전화가 왔다. 오지 말라고.
‘내가 가면 너가 막을꺼가 우짤거가. 저가 오라마라 할
권한 없는거 아닌가. 가자’는 생각이 들어서 그냥 갔다. 아침에 막고 있던 경찰은 없고 외통부 직원이 나와서 기자회견장을 가자고 하더라. 내가
오전에 기자단 간사하고 이야기할 때는 8시에 4층 브리핑 룸에서 하기로 했는데, 외통부 직원은 2층으로 안내를 했다. 그래서 “4층으로 알고
있는데, 왜 2층이냐”고 물었더니, “2층에 별도로 마련을 해 놨다”고 했다. 다시 물었다. “4층에 기자들이 있냐, 없냐.” 그랬더니 “다
어디 갔다”고 했다. 일단 들어갔는데, 기자가 딱 2명 있는 것이다. 내가 얼른 보좌관 보고 4층에 가보라고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외통부가 장난을 죽인거구나’ 하면서 있는데, 보좌관이 오더니 얼른 4층으로 가자고
하지 않겠나. 아무 말 없이 가고 있는데, 직원이 또 따라오면서 “의원님, 4층은 쓰기가 곤란합니다”라는 거다. 참, 속으로 괘씸한 생각도
들고, 이 친구들이 국회의원이 바로 현장에 있는데 어떻게 이런 거짓말을 하는가 싶어 황당하기도 해서 말 한마디 안 하고 그냥 올라갔다.
그런데, 4층에 도착하니 나를 보고 직원이 문을 닫고, 잠궈버리더라, 안에서. 하도
어이가 없어서 “이게 참 무슨 이런 짓이 있나. 뭐하는 짓이냐”고 화를 내니 그때서야 따라온 직원이 문을 열라고 하더라. 그때서야 문을 열었다.
그래도 들어가서 직원들 보고 아무 소리 안하고 그냥 단상에 올라가서 기자회견을 했다.
“일하는 사람들이 희망을 가지면서 일하는 사회가 되어야 하는데, FTA 체결이 되면 땀 흘려 일하는 사람들이 더
이상 희망을 가지기가 어려운 세상이 된다”며, 왜 원정투쟁을 하러, 왜 FTA 반대를 하러 시애틀까지 왔는지 이야기했다. 그리고 나서는 광우병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서한을 낭독하는데, 마이크를 꺼버리는 것이 아니겠나. “왜 마이크가 꺼지냐”하니 외통부 홍보관이라는 사람이 “죄송하다.
내가 껐다. 이 자리는 찬반을 논하는 자리가 아니고, 협상을 브리핑하는 자리기 때문에 반대의 주장이나 이런 것들에 대한 입장을 발표할 수가
없다”더라.
내 개인의 편지도 아니고, 열린우리당, 한나라당, 민주당, 민주노동당,
국민중심당 5개 정당이 다 참여한 36명 국회의원들의 서한이라고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이러는 법이 어딨냐고 항의를 해도 “마이크를 끈
것은 내가 백 번 잘못했지만, 다시 켜 줄 수는 없다”고 하더라. 결국, 윗사람 지시라는 이야기였다.
외통부 사람들을 만나 이렇게 외골수적으로 경직되고 폐쇄적으로 무슨 외교를 하겠냐고 호통을 치며 국회에서 문제를
삼겠다고 하고 돌아왔다. 내려오는데, 직원들이 풀이 죽어서 나를 쳐다보지도 못했다. 사실, 그 직원들이 무슨 잘못이 있겠나. 다 위에서 시키니까
그런 거지...
투쟁단과 함께 일정 중간 중간, 이 부분에 대한 항의 숙소투쟁을
진행했다. 기자회견을 막은 김종훈 대표는 그냥 사라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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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회견을 막은 김종훈 대표는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민중의소리 정택용 기자 |
- 그럼, 원정투쟁 기간 내내 김종훈 대표는 못 만난 것인가?
한 번도 못 만났다. 기자회견을 할 때도, ‘내 입장이 곤란하고 그만 뒀으면 좋겠다’ 싶으면 직접 나서서 설명을
하고 양해를 구한다거나 하는 게 예의지, 어데 딱 앉아서 직원을 시켜서 마이크를 끄나. 몰상식하고 거만하기 짝이 없는 작태다.
- 삼보일배가 현지인들의 많은 관심을 끌었다고 들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싶다. 오후에 했는데, 미국 시민들이 많이 보는 것
같았는데, 사실 잘 몰랐다. 주위를 보면서 한 것이 아니라, 정말, 하늘의 소리와 땅의 울림이 민중의, 백성의 소리지 않나? 그 마음으로
우리들의 이런, FTA를 반대하는 마음이 하늘의 소리, 땅의 울림이라는 신념으로 했다. 우리의 뜻이,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절을
하면서 우리의 마음을 땅에다 심는 마음으로, 우리 사람들이 하늘과 땅의 뜻을 실현시키는 마음가짐으로 했다. 온전히 거기에만 정신을 썼기 때문에
반응이 좋았는지는 몰랐다.
나중에 미국 언론에 시민들 반응이 상당히 좋다고 많이
나왔다고 하더라. 언론에서도 좋은 평을 많이 했다고 하고. 그래서 반응이 좋았다는 것을 알았다.
- 원정투쟁 마지막 날 했다는 장례식도 언론의 주목을 많이 받았다. 현지인들도 큰
관심을 보였다고 하던데. 마지막 날 상여를 만들고 FTA 장례를 치르자고
했다. 반전반핵운동을 하는 시민단체도 왔는데, 6~70대 할머니들도 많이 나왔다. 함께 반전 평화에 대한 노래를 합창하기도 했다.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나서 장례식을 하는데, 원래는 한 농민이 소리꾼을 하기로
했었다. 그런데 그 농민이 그걸 안 해본 사람이라서, 나한테 꼭 좀 소리를 해달라고 부탁을 하더라.(웃음) 그래서 얼떨결에 상여 앞에 서서
소리꾼을 하고 행진을 했다. 가다 보니 큰 농산물 마트가 나왔다. 가장 큰 농산물 시장이라고 하던데, 그 안에 있던 수천 명의 사람들이 다
나와서 박수도 치고, 손을 흔들면서 구경을 많이 했다. 살풀이춤도 추고, 상여 행진도 하면서 집회를 정리했다.
- 시위대가 협상장 진입을 시도하다 연행이 된 일도 있었다고 들었다. 무슨 일이
있었나? 그게 이른바 미국에서는 시민불복종 운동이라고 하던데, 미국에서는
최고 수위의 시위라고 했다. 우리 맘에 좀 안 든다 하더라도, 일방적으로 추진하는 정부를 강력히 응징하려면 미국의 노동운동, 시민운동 수위에
맞춰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결론이었다. 사실, 우리는 더 강력하게 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지만, 미국 노조에서 먼저 최고수위라며 같이 결합하겠다고
제안했다고 하더라. 그래서 함께 했다. 연대를 최고조로 강화하자는 의미도 있었다.
함께 협상장 진입을 시도하다가 한국인 9명, 미국인 6명 등 총 15명이 연행이 됐고, 나머지 사람들은 협상단
숙소로 숙소 투쟁을 하러 갔다. 그 때 총영사가 경찰서장을 만나고 해서 한국인들은 벌금도 안 먹고 훈방으로 나왔다.
이상한 것은 미국인들이었다. 원래 외국인은 재판에 다시 안 올지도 모르니까 500불
정도로 비싸게 벌금을 물리고, 내국인들은 50불 정도에서 끝나는데, 내국인들이 모두 1200불 정도씩 아주 많이 벌금을 먹였다. 이상한
일이었다.
- 집회를 대하는 한국경찰과 시애틀 경찰의
태도에 차이는 없었나? 우리나라는 집회를 하면, 협상장 근처 몇백 미터는
접근도 못 하게 한다. APEC 때도 그렇지 않았나. 그런데 미국은 다르다. 백악관 가까이에도 가서 뱅뱅 돌 수도 있고, 협상장 정문 입구에서도
집회를 할 수 있다. 숙소도, 호텔 문 앞에까지 가서 할 수 있다. 김종훈 대표는 결국 빠져나갔지만. 어쨌든, 협상단이 들리게 우리 주장을 할
수 있게 해 준다는 것이 큰 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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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이 되어, 촛불이 되어 앞으로도 당당하게 FTA 반대를
외치자고 말하고 싶어요" ⓒ민중의소리 정택용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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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원정투쟁의 아쉬운 점을 꼽는다면? 일단, 일차 때와 비슷하게 장례식,
삼보일배, 기자회견 등 투쟁의 방식을 답습했다. 상여를 바다에 못 넣게 하고, 태우지도 못하게 했는데, 그렇다면 FTA 관을 만들어서 짓밟을 수
있지 않나. 방법적인 것이 달라져야 한다.
삼보일배도, 그야말로 사람들이 다 탈진할
정도로 했어야 한다. 미국의 엄격한 법 때문에, 속에서는 불꽃이 올라와도 우리 원대로 투쟁을 못 했다. 삼보일배라도 진하게 하루 종일 했어야
한다. 물론, 쓰러지기 직전까지 간 사람도 있다고 하지만, 그런 사람은 중단하더라도 좀 더 우리의 열정을 다 쏟는 내용이 있었으면 좋았겠다는
개인적 바람이 있었다.
부시한테 보내는 서한을 총영사관에 전달했는데, 부시가 그걸
받았는지 아직 확인이 안 되고 있다. 작년 부시가 정상회담 전에 노무현 대통령에게 광우병 쇠고기와 관련해 ‘이거 하나만 해결이 안 되고 있다’며
압박을 했다. 그래서 정상회담 전에 전달이 되기를 바랐는데, 아직 확인이 안 되고 있어서 안타깝다.
또 하나는 우리 시위대가 너무 적게 갔다는 것이다. 60여명이 갔는데, 너무 적다. 미 대사관에서 비자 발급을 많이
제한했다 하던데, 너무 급하게 내려고 하니 문제가 생긴다. 물론 미국에서 까다롭게 하는 문제도 있지만.
그러나 멕시코 칸쿤때, 우리 농민들만 100여명이 갔다. 홍콩에는 천여 명이 갔다. 미국이 멀긴 하지만, 빚을
내서라도 와야 한다. FTA 되면 어차피 살림 다 망치는 것 아닌가. 미리미리 비자 발급 받아서, 농민 노동자가 앞으로 대거 투쟁전선에 나서야
한다.
- 마지막으로, 이번 원정투쟁의 가장 큰 성과에
대해 짚어보고 싶다. 우선은, 우리가 협상자체를 저지, 지연시키는 등의
큰 효과나 성과는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 정부에게, 또 미국 협상단들에게 이렇게 노동자와 농민이 절규하고, 강력히 반대하고 있다는 것을
협상 중간에 알려줬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건물 안에 다 들리게 외쳐댔으니, 양심적인 부담을 분명히 느꼈을 것이다.
또, 미국 사람들이 미국이 어떤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너무 모르고 있다. 우리가
유인물도 만들어서 돌리고, 미국 언론들이 많이 다루고 보도를 했기 때문에 미국 시민들이 많이 알았을 것이다. 멕시코에 있는 친구도 신문을 보고
알았다며 전화를 걸어오기도 했다. 즉, 노동자와 농민들이 왜 반대를 하고 있는지 알려내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국내에서도 언론에 많이
다뤄졌다. 무관심한 사람들이 보도를 보고, 이 문제를 다시 한 번 환기하는 효과도 있었다고 본다.
“역사에 아주 중요한 획을 그을 FTA를 우리 민중이 저지하겠다는 몸부림을 했다는 것, 이것 자체가 역사에 길이
남을 이번 투쟁의 성과이다. 우리가 지금 FTA를 막지 못해도 누군가 이 역사적 발걸음을 발견하고, 다시 시작해 저항의 역사를 이어갈 것이다.
민중을 억압하고, 착취하는 자본이나 독점자본, 소수재벌의 침략적 행위를 막아낼 것이다.
참여한 많은 사람들에 대한 신념과 긍지, 자부심을 가지고 계속 걸어가자고, 불꽃이 되고, 촛불이 되어, 앞으로도
당당하게 반대 투쟁을 하자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