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FTA 의약분야 협상 진행상황이 만만치가 않다. 한미 양국은 이번 3차협상을
종결하면서, 4차협상 전에 따로 자리를 만들어 의약분과, 지적재산권 협상을 별도로 진행하겠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직접 만나기 어려우면 화상 회의라도 하겠다고 한다. 연말까지 한미FTA 협상을 끝내야하는데, 이 분야들이 해결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6일 시애틀에서 열린 의약 작업반 협상에서는 미국이 또다시 한때
협상에 강한 불만을 제기했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미국 측은 이날 의약품의 선별등재
및 가격결정 과정에 자국 업체들의 이익을 반영할 통로를 마련해달라(미 업체관계자 참가 등)는 기존의 요구사항과 함께, 신약에 대한 특허권을
강화해달라는 새로운 요구를 제시했고, 한국 협상단이 이에 소극적인 자세를 보이자, '우리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협상을 중단할 수 있다'는 식의
강경한 태도를 취했다고 한다.
자기네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절대로 물러설 수
없다는 태도다. 미국이 이처럼 강경하게 나오는 까닭은 바로 '포지티브 리스트 시스템(건강보험 의약품 선별등재)' 때문이다.
미국, '포지티브 리스트' 수용했으니 "이번에는 우리 요구사항 들어달라"
신약이 나오면 무조건 건강보험 적용을 해주던 기존의 방식과는 달리, 앞으로는 가격대비
효과가 우수한 의약품을 선별해 건강보험 적용 리스트에 올리겠다는 이 '건강보험 의약품 선별등재 방식'에 대해, 지난 7월 2차협상 당시 미국은
이를 절대 수용할 수 없다며 협상장까지 박차고 나갔었다.
그런데 미국은 돌연 지난달
초 태도를 바꿔 이를 전격적으로 수용하겠다고 나왔고, 그 조건으로 훨씬 더 강경한 자기네 요구사항들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 약값을 결정하는 정부 회의에 미국 제약회사 관계자를 참여시켜달라는 것이나,
대부분 미국 제약회사가 만든 신약의 특허권을 강화해달라는 등의 요구는 모두 미국 기업의 이익을 더욱 확대하기 위한 것이다.
'포지티브 리스트 시스템 수용'이라는 '빚'을 지고있는 한국 측은 어떤 식으로든
이같은 미국의 요구를 상당부분 들어주지 않으면 안될 입장이다. 웬디 커틀러 미측 수석대표가 3차 협상 시작 전부터 '협상의 원칙은 기브 앤
테이크의 원칙'이라고 못박아 밝혔으니 말이다.
커틀러 대표는 이에 그치지않고 "우리가
한국측 포지티브 리스트를 인정해주고, 그 반대급부로 한국측이 포지티브 리스트의 세부사항에 대해 협상하기로 했다"고 분명히 말했다. '포지티브
리스트의 세부사항'이라고 듣기좋게 포장했지만, 사실은 미국측의 이익을 보장하기 위한 요구사항을 들어달라는 말이다.
제도 수용하겠다며, 반대급부로 제도 효력상실하는 요구 내놔
그런데 만약 미국이 새롭게 제시한 요구사항들이 사실상 '포지티브 리스트'를 무력화시키는 것이라면? '포지티브
리스트를 수용했다'는 것이 기실 말뿐이고, 내용은 텅 빈 거짓말이라면?
이렇게되면
한국 정부는 '우리가 주장한 포지티브 리스트를 미국이 수용했다'는 명분만 얻게될 뿐, 실제로는 더 큰 이익을 미국에 빼앗기는 셈이다. 약값을
낮추겠다는(실제 포지티브 리스트 시스템을 '약제비 적정화 방안'이라고도 부른다) 포지티브 리스트가 거꾸로 약값을 더욱 올리고, 환자들의 고통을
가중시키는 결과를 낳는 것이다.
건강권실현을위한보건의료단체연합 등 시민단체들은
"미국이 포지티브 리스트를 수용했다는 것 자체가 거짓말"이라고 지적한다.
한미 정부가
말하는 세부협상이라는 것이 사실상 포지티브 리스트를 무력화시키는 것이며, 이번 협상에서 본격적으로 논의하게 될 특허권 강화문제는 약가를 폭등시킬
것이라는 것이다.
한국 정부는 미국이 포지티브 제도를 수용해 의약품 분야 협상의 가장
큰 사안을 해결한 것처럼 스스로 공치사를 하고 있지만, 지난달 싱가포르에서 열린 의약품 별도협상에서 미국이 요구한 16개 사안을 살펴보면 결코
그렇지 않다.
시민단체, "포지티브 리스트 수용은 거짓말, 약가 폭등할
것"
미국이 포지티브리스트를 수용할 생각이 없다는 것은 과거 네거티브 리스트를
운영하고 있던 시절에도 미국이 요구하던 사안이 이번에도 똑같이 포함되어 있으며, 포지티브리스트 자체를 거부했던 1, 2차 협상당시 핵심요구였던
“신약차별금지와 신약의 접근성 강화 사안”이 이번에도 변함없이 포함되어 있는 것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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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협상에서 미측이 제시한 16개 요구사항
1) 혁신적 신약 및 복제의약품, 의료기술상품 개발촉진 및 지속적인 접근성 강화 원칙
2) 혁신적 신약 또는 복제약 여부 및 제약사의 국적에 관계없이, 약가 산정 및 급여 결정과정에서의 비차별
3)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의 등재 적절성 판단의 기준, 방법 및 표준 4) 급여결정을 위한
의약품의 효과 판단기준, 방법 및 표준 5) 의약품의 치료적, 경제적 가치판단을 위한 약물 경제성 평가의 기준,
방법 및 표준 6) 국민건강보험공단과의 약가협상 과정에서 등재가격 산정의 기준, 방법 및 표준
7) 필수의약품에 대한 의무급여 신청 8) 가격협상 실패시 필수 의약품의 직권등재
9) 의약품 가격산정, 급여 및 규정에 있어서 법, 규정, 절차적 투명성 10) 약가
및 급여기준의 결정기준, 방법, 시기, 체계에서의 독립적 검토 11) 직권결정 및 사후 약가, 급여 재조정 -
약가재평가, 복제약 진입에 따른 약가 재조정, 물가상승 감안 재조정, 사용량-약가 연계 12) 기등재 품목 보호
13) 복제약 가격산정 및 급여기준 및 방법 14) 윤리적 영업관행
15) 전문의약품 대중광고 허용 16) 의약품/의료기기
위원회 | | |
미국측 요구 16개 사안 중 2-3가지만 수용한다고 해도 약가는 폭등할 수밖에 없으며, 포지티브리스트는 무력화된다고
보건단체들은 설명한다.
"선별등재 수용하겠다"면서 "선별등재 하지
말자?" 예컨대 12번 '기등재 품목 보호'는 선별등재방식을 정면으로 부인하는
것이다. 선별등재방식에 따르면, 내년부터 기존 의약품들에 보험적용 여부를 따져 재등재해야하는데, 12번 조항은 이를 건드리지 말라는 것이다.
우석균 건강권실현을위한보건의료단체연합 정책국장은 "이는 포지티브리스트를 하지 말자는
말과 꼭 같은 것"이라며, "포지티브리스트 수용은 말 뿐이고, 이를 명분으로 자국 의약품의 독점적인 지위를 계속 누리는 것이 미국이 노리는
바"라고 말했다.
15번 '전문의약품 대중광고 허용'도 전문적 판단이 요구되는
의약품을 오로지 이윤만을 위해 완전히 '상품 취급'하는 미국의 본질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우 국장은 설명한다.
"광고에 따른 선호도가 생기면, 환자들이 약을 직접 선택할 수가 있게되죠. 약국에 가서 '광고에 나왔던 그 약
주세요' 할 것 아닙니까. 약값을 더 높게 받으려는 술책 중 하나죠."
상황이
이러한데도 한국정부는 남의 나라 제도에 “감놔라 배놔라 할 수 없다”던 주무 장관이 말을 바꾸어 “양보는 있을 수 있지만 공개는 하겠다”며 마치
중요사안은 이미 해결이 된 것처럼 말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처음엔 강경하던
유시민 장관, 이제는 "양보할 수도 있지.." 시민단체들은 한국 약값 결정에
미국 제약회사 관계자를 참가시켜달라는 요구는 물론이고, 특히 특허권을 강화해달라는 요구를 수용하면 이는 한국 약가 폭등으로 이어질 것이
자명하다고 말한다.
미국은 1995년 세계무역기구(WTO)가 설립될 때 이미 전
세계를 상대로 의약품에 대한 자국의 독점권을 강화했는데, 여기에 이용한 것이 바로 특허권이다. 무역관련 지적재산권협정(TRIPS 협정)에서는
특허보호기간을 20년으로 연장함으로써 의약품의 독점 기간을 늘렸다.
미국은 TRIPS
협정에서 관철하지 못한 것은 FTA를 통해 확산시키고 있는데, 한미FTA 3차 협상에서 미국이 제시한 요구들이 바로 이에 해당하는 것들이다.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유사 의약품에 대한 자료 독점권 인정이다. 유사의약품에 대한
자료독점권 요구만 인정하더라도 한국에서의 복제약 생산은 5년이 늦어지게 된다.
미국, WTO에서 관철 못한 것들 FTA 통해 얻어내
값이 비싼 신약의 경우, 단 10여 종에 이 제도가 적용되면 미국 제약회사는 연 5000억원을 한국에서 더 벌어가게
된다. 이 제도는 최근 미국이 맺은 모든 자유무역협정에서 미국이 관철한 사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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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사의약품 자료독점권이란? 미국은 현재
동일한 성분, 동일한 효과를 가진 ‘동일 의약품’에만 적용되는 자료 독점권을 ‘유사 의약품’까지 확대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유사의약품’이란 성분은 달라도 효능은 같은 의약품을 말하는 것으로, 현재 대부분 복제의약품(제네릭)을 생산하는
한국 제약회사들은 유사 의약품 허가 신청을 낼 때 특허권자(다국적 제약회사)가 가지고 있는 자료를 이용할 수 있다. 이 자료들을 이용함으로써
비용을 줄이고, 더 빠른 시간안에 값싼 약품들을 시장에 내놓을 수가 있는 것. 그런데
미국은 이 자료들을 이용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것이다. 이런 유사의약품들이 시장에 늦게 나올수록 다국적 제약회사는 더 많은 돈을 긁어갈 수 있게될
것이다. | | |
또 미국이 지적재산권을 이용, 한국정부의 보건의료 정책을 무력화시키려는 전략 중 하나가 바로 ‘비위반제소’이다.
비위반제소 문제는 TRIPS 협정을 논의할 때에도 미국이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가 실패한 사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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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위반제소란? 상대국 정부의 어떤 정책이 기업이 기대했던 이익에
반한다고 판단되면 그 정부를 제소할 수 있는 권리를 주는 것. 이 기준은 순전히 미국 정부나 기업의 판단에 의존한다.
예컨대 한국 정부가 추진하는 약값 정책이 미국 제약업체의 이익에 반한다고 생각된다면
해당 기업이나 그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미국 정부가 한국 정부를 제소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제도는 한미 FTA 협상 지적재산권 분야의 미국
측 요구사항에 들어 있다. 미국이 지적재산권을 이용해 한국정부의 보건의료 정책을
무력화시키려는 전략 중 하나가 바로 ‘비위반제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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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정부는 의약 협상은 약값의 산정과 등재에 제약회사의 이해가 걸려있으므로 FTA 협상대상이 될 수 있다고
말하지만, 시민단체들은 사회공공제도인 약가제도나 건강보험제도가 협상대상이 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주장한다.
약가제도와 건강보험제도가 한미 FTA에서 다루어지는 순간 웬디 커틀러의 말대로 '주고받기'가 진행될 수밖에 없으며,
여기서 주고받는 것은 다름아닌 국민건강권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