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거티브냐 포지티브냐, 국민의 머리는 복잡하다.
한미FTA 2차 협상 과정에서 의약품 문제가 불거졌다. 한국은 의약품 건강보험 등재 방식을 포지티브 방식으로 바꾸겠다고 하고 미국은 그것을 절대
용인할 수 없다고 나섰다. 미국은 네거티브 방식을 선호한다. 네거티브란 모든 약이 건강보험 급여 대상으로 무조건 등재되는 것을 뜻한다.
포지티브, 네거티브가 문제 되는 것은 그것이 ‘약값’과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국은 한국의 ‘약값’ 정책에 아주 관심이 많다.
2004년 미 상무성 보고서에 의하면 약값통제를 중단했을 경우 2003년 기준으로
OECD 회원국 중 11개 나라에서만 약 176억에서 267억 달러 정도의 의약품 수입액 증가가 있었을 것으로 계산됐다. 미국이 왜 한국의
의약품가격 정책에 관심이 많은지 추측할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다. 미국은 압도적인 의약강국이고 수출국이다.
건강보험급여의 대상이 되는 약품들의 등재 방식을 네거티브 방식에서 포지티브 방식으로 바꾸는 것이 좋겠다는 것은 이미
2003년부터 논의됐던 것이다. 그것이 이달에 입법예고 될 예정인 ‘건강보험요양급여기준에 관한 규칙 개정안’으로 결실을 맺었다. 현재 OECD
가입국의 80%가 포지티브 방식을 취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현재 치료용 약품이
아닌 경우와 처방을 받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의약품을 제외하고는 모두 보험급여 적용 대상인 네거티브 방식이다. MBC 보도에 의하면 한
혈압강하제의 경우 같은 성분, 같은 효능의 약 값이 283원에서 28원까지 10배의 편차가 난다. 2004년 기준으로 같은 효능의 약들 중에서
최고가 약이 처방되는 경우가 59.5%, 사실상 60%였다. 병원은 보다 많은 이윤이 남는 약을 처방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윤이 많이
남는 비싼 약은 오리지널 약이고 싼 약은 복제품들이다.
건강보험 약제비 지출을 보면,
2001년엔 4조1800억 원이었던 것이 2005년엔 7조2200억 원으로 급격히 늘어났다. 1999년에 수입 의약품의 보험 등재가 가능하게
되면서 외국 제약회사들의 시장 점유율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약제비 지출도 늘었다. 건강보험 총 진료비에서 약제비가 차지하는
비중이 2005년에 29.2%에 달했다. 그런데 OECD국가 평균 약제비 비중은 17.8%다. 국민이 내서 국민의 보건의료를 위해 쓰여야 할
건강보험 예산이 다국적 제약회사의 폭리로 새는 냄새가 풀풀 난다.
포지티브 방식으로
바꾸면 터무니없는 가격의 의약품은 시장에서 퇴출되거나, 스스로 가격을 낮춰야 한다. 값과 효능을 따져 가장 효율적인 약들만 등재되므로 환자들이
영문도 모르고 바가지를 쓰는 일이 줄어들게 된다.
웬디커틀러 미국 측 수석대표는
포지티브 방식은 시장접근성을 높여 양국 국민의 혜택을 늘이자는 한미FTA의 정신을 위반하는 것이며, 약제비 부담 절감이라는 정책 목표도 이룰 수
없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미국과 FTA를 체결한 페루 정부에서 펴낸 보고서 'Song
of the Sirens'에선 10년 후 약값이 두 배로 오를 것이며 매년 70만에서 90만 명의 국민이 의약품 접근권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라고
예측돼 있다. 우리 정부가 한미FTA와 관련해 온갖 정보 조작, 왜곡의 의심을 받고 있듯이 페루 정부도 미국과 FTA한 것의 효과를 장밋빛으로
부풀리는데 열심일 것이다. 그런 페루 정부가 펴낸 보고서다. 웬디커틀러 대표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현재 우리나라 제약회사의 의약품 중 오리지널 약품은 11종에 불과하다. 그 외 오리지널 약품은 모두 수입이다. 국내
제약회사가 파는 나머지 2만종 이상은 모두 복제품인 제네릭 약품이다. 오리지널 약품을 개발한 쪽은 제네릭 의약품의 범람이 눈에 가시다. 그래서
그들, 즉 미국은 제네릭 의약품의 시장 추방이 숙원이다. 미국이 자주 사용하는 수사인 “개발자의 개발의욕”이라는 말은 제네릭 의약품 때문에
자기들이 기분 나쁘다는 뜻이다.
지금은 개발 후 20년간 개발자의 독점권이 인정된다.
20년이 넘은 제품은 누구라도 복제품을 만들어 팔 수 있다. 개발자들은 20년간 천문학적인 수익을 올린다. 그 후에도 오리지널 약을 영원히 찍어
팔 수 있다. 인간의 생명에 직결되는 의약품의 특성상 개발자와 회사의 이윤이 규제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 선이 20년이다.
미국은 에버그리닝(evergreening)이라고 해서 제네릭 약품의 제조를 영원히
금지시키는 방향으로, 즉 자신들의 독점권을 영원히 푸르게 유지하자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있다. 그들이 푸를 때 민중은 말라죽어간다. 노바티스
사의 백혈병 치료제 글리벡은 출시 5년 만에 60억 달러의 매출을 올렸다. 20년 동안 이렇게 버는 것으로도 성이 안 찬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환자들은 돈이 없어 글리벡을 쓰지 못하며, 일부는 인도의 제네릭 약품을 개인적으로 수입해 쓰고 있다.
2000년 8월 기준으로 에이즈 환자 한 명에게 투입되는 연간 의약품 비용은 1만 439 달러였다. 물질특허제도가
없는 브라질에서 제네릭 약품을 만들었다. 연간 비용이 2767 달러로 줄었다. 2001년에 인도에서 또 다른 제네릭 약품이 350 달러 정도의
비용으로 나왔고 나중엔 168 달러까지 떨어졌다. 당연히 오리지널 약품의 값도 500 달러대까지 떨어졌다. 미국은 약값이 떨어지면 오히려 국민이
혁신적인 신약으로부터 소외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개뿔!
원칙적으로 후진국 입장에선
브라질처럼 특허를 무시하는 것이 기본이다. 선진국은 당연히 지재권을 독점하기 위해 혈안이 된다. 우리 같은 중진국은 어중간하게 끼어서 미국의
특허권은 무시하고 싶지만 중국에게는 한류 제품 복제하지 말라고 하고 싶은 단계다. 그러니까 지재권 분야는 어중간하게 가면 된다. 그러나 미국은
한미FTA를 통해 극단적인 지재권 보호를 요구하고 있다. 우리가 미국 요구를 다 들어주면 가랑이가 찢어진다.
우리나라는 15종의 혁신적 신약의 경우 선진 7개국 평균 가격을 받을 수 있다.(정확히 현재 76% 수준) 미국은
이것도 못마땅하다. 혁신적 신약의 범위를 더 늘리고 약값도 올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상위 10%가 전체 약품비의 80% 이상을 차지한다. 혁신적
신약이 늘어나면 약 못 사먹는 사람들 늘어나고, 건강보험 파탄난다.
혁신적 신약
제외하고는 선진 7개국의 48.4% 수준이다. 미국은 이것도 값을 올리라고 한다. 오리지널 약품 가격이 올라가면 미국 제약회사의 한국 직접
진출이 더욱 늘어난다. 어차피 개발능력도 없고 규모도 영세한 한국 제약회사들은 오리지널의 위세가 커질수록 차근차근 떼죽음당하는 수순이다.
이렇게 되면 장기적으로 민중이 의약품에 접근할 수 없게 될 뿐만 아니라, 국가 전략상
중요한 차세대 성장주도 품목인 바이오제약 분야에도 치명적인 타격이다. 미국은 이미 보험대상으로 등재된 경우에도, 급여 판정에 또 불만이다.
미국의 오리지널 약품에 대한 급여 판정을 더 폭넓게 하라는 것이다. 역시 약값 비싸지고 건강보험 파탄 나는 지름길이다.
포지티브 방식은 의약품 정책의 출발이다. 그래서 미국은 강하게 반발했고 한미FTA
2차 협상 결렬이라는 뉴스까지 나왔다. 하지만 포지티브 방식이 완성일까?
포지티브
방식은 효능과 가격을 고려해 보험급여 대상을 선별하겠다는 정책일 뿐이다. “다 고려했더니 역시 미국산이 좋더라!“ 이렇게 되면 어떡하지? 1억
달러 제작비의 미국영화가 한국 시장에서 극장입장료 7000원, 비디오 대여료 500원에 팔리는 마당에 오리지널 약품이라고 그렇게 못 팔 건 또
뭔가. 이 경우 의약품 가격이 떨어지더라도 국내 제약회사의 떼죽음은 피할 수 없다.
약값과 제약바이오 산업의 미래가 우리가 잡아야 할 두 마리 토끼라고 할 때 더 문제가 되는 것은 포지티브 방식으로도
어쩌면 약값조차 잡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미국이 포지티브 방식에 강하게 반발하는 모양새를 취하면서 한국 정부를 압박하고,
나중에 포지티브 방식을 받아주면서 특허기간의 연장이나, 제약회사들의 의약품 가격 산정 절차 관여를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김종훈 수석대표의 “선별 등재는 확고하지만 약값과 효능을 평가하는 방법은 미국과
협상으로 풀 수 있다.”는 발언이 아무리 생각해도 찜찜한 것은 바로 이 대목에서다. 뿐만 아니라 김대표는 좋은 약이라면 비싼 값을 주고라도 사게
된다는 발언도 했다. 좋은 약? 즉 효능으로 평가하면 혁신적 신약이 더 늘어날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 관료들의 시장주의적 사고방식도 문제다. 정부는 이왕이면 국산을 조달해야 한다. 그런데 이것을
공공연히 공표해서는 안 된다. 이심전심으로 하는 것이다. 우리나라 관료들에게 이런 사고방식이 개발독재의 종언과 함께 사라진 것 같다는 것이
문제다. 그 시장 좋아하는 미국이 지금 기술력으로 이렇게 큰소리 칠 수 있게 된 배경도 정부조달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정부조달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스크린쿼터도 우습게 생각하는 정부가 제약회사라고 별다르게
생각할지 걱정이다. 약값과 효능을 평가해 선별 등재할 때 국산품에 대해 강력한 인센티브가 암묵적으로 주어져야 하는데 이 부분에서 우리나라
관료들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다. 이것도 포지티브 방식이 갖고 있는 함정이다. 기존의 의약품 유통 체계에서는 국산품에 대해 인센티브가 주어졌다.
바로 리베이트라는 전근대적인 유통관행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는 비관세 무역장벽이라고 한다. 미국에겐 리베이트 관행도 눈에 가시다. 유통체계를
투명화하면서 제약산업도 발전시키려면 관료들이 영악해야 한다.
즉 싼 국산 제네릭
약품을 보호해 민중의 의약품 접근권을 지키면서, 국산 신약이 설사 약간 비싸거나 조금 떨어진다고 해도 포지티브 리스트에 우선적으로 등재시켜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주요 국내 제약회사들이 씨가 마르지 않게 하는 산업적 고려도 리스트 등재 대상 선별시 필요하다. 물론 이런 것들은 절대로
공공연히 진행 되선 안 된다. 드라마 주몽에서 금와황제가 한나라 몰래 철기를 개발하듯이 해야 한다.
어쨌든 포지티브 방식은 문제가 있더라도 옳은 방향이다. 하지만 그것이 모든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포지티브 방식만은
지키겠다는 우리 정부를 보며 아직 샴페인을 터뜨려선 안 된다. 미국은 포지티브 방식도 충분히 받을 수 있다. 포지티브 방식과 특허기간 연장을
일괄타결하는 따위의 협상은 절대 있어선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