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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 [정태인의 FTA 보고서] 멕시코에 떨어지는 건 노동자 임금뿐

baejjaera 2006. 6. 3. 14:59

아래 기사는 한겨레(www.hani.co.kr)에서 퍼온 것이며, 기사에 대한 저작권은 한겨례에 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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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티야와 민주주의의 죽음


멕시코 마킬라도라를 누비며 FTA의 실상을 파헤친 정태인 전 비서관의 보고서… 수출·투자 증가에도 빈곤 심화되는 패러독스, 기업이 헌법을 넘어 국가를 제소

 

▣ 정태인 전 청와대 국민경제비서관
▣ 사진 ·곽윤섭 기자 kwak1027@hani.co.kr

 


“멕시코는 전세계 시장의 절반 이상에서 특혜관세를 받고 있다.” 자랑스러움으로 가득 찬 멕시코 고위 경제관료의 이야기이다. 과연 대단한 일이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에 대한 그의 확신은 폭증한 수출과 홍수처럼 밀려들어온 외국인직접투자(FDI)로 이어진다. 대한민국 고위관료들의 한-미 FTA 홍보와 똑같다.


멕시코에 떨어지는 건 노동자 임금뿐


그런데 왜 1인당 국내총생산(GDP) 성장률은 이미 <한겨레>가 밝혔듯이 1993년부터 2005년까지 연평균 1.45%에 지나지 않을까? ‘멕시코 패러독스’라고 할 만하다.

△ 미국과 FTA를 맺은 뒤 멕시코의 수출·투자는 늘어나는 데도 노동자·농민의 생활은 점점 나빠지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멕시코 빈민가(사진/ 곽윤섭 기자)

 

비밀의 핵심은 마킬라도라에서 찾을 수 있다. 자동차 빅6 중 현대를 제외한 삼성·LG·소니·파나소닉 등 전자부문의 세계적 기업이 모두 몰려든 인접지역의 이 산업단지는 90%의 부품 및 기계를 미국에서 수입한다. 나머지 10% 중에서도 멕시코에서 조달하는 양은 불과 3% 정도다. 12시간 노동에 월 20만~40만원에 불과한 싼 임금을 이용해 조립한 완성품의 85%는 다시 미국으로 수출된다. 당연히 외국인직접투자와 수출은 빛나는 수치를 자랑하지만 사실 멕시코에 떨어지는 건 한창 때 130만 명까지 이르렀던 노동자들이 받는 임금뿐이다. 초국적 기업에 소속한 사람들이 멕시코에서 풍요로운 소비를 하기에는 미국이 너무 가깝다. 이윤은 그다지 많이 재투자되지 않는다. 언제든 이전할 준비를 하는 초국적 기업들은 단기에 최대의 이윤을 노릴 뿐이다.

 

그래도 그게 어디냐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대가는 가혹하다. 3%의 부품을 조달하는 멕시코 국내기업은 행운이었지만 나머지 내수용 중소기업들은 대거 파산했다. 농촌은 더 비참하다. 2천 기가 넘는 피라미드의 화려한 ‘현대적’ 문양에 나타나듯 멕시코는 옥수수의 나라이다. 쇠고기든 돼지고기든 또는 맛깔 나는 채소든 모조리 싸서 먹는 멕시코의 자랑 토티야는 이제 미국 옥수수로 만든다. 미국의 엄청난 농업보조금 탓이며, 또한 NAFTA 때 약속한 쿼터보다도 훨씬 많은 양이 밀려들었기 때문이다.

 

더 나쁜 것은 과거에 농업유통을 맡았던 국영기업이 민영화하면서 카길로 대표되는 미국의 초국적 농기업과 손을 잡고 소비자 가격을 올렸다는 사실이다. 이 현상은 철도, 전화 등 민영화한 다른 공공서비스에서도 어김없이 나타났다. 자유무역의 성과가 일반 국민들에게는 마이너스 소비자 후생일 뿐이다.

 

갈 길 잃은 국민이 어디로 갈 것인가? 길은 세 갈래다. 저 자랑스러운 100년 전의 전설적 영웅 사파타를 좇아 농민봉기를 일으키든가(사파티스타), 멕시코시티에 흔전만전한 노점상이 되든가, 아니면 미국의 옛 멕시코 땅을 찾아 목숨을 걸고 넘어가는 것. 노동력의 고육적 수출은 개방·자유화의 마지막 단계인 셈인가. 현재 미국에는 1600만 명의 멕시코인이 살고 있고, 그중 불법 이민이 350만 명에 이른다. 이들의 송금은 멕시코의 세 번째 외환 수입인 셈인데 그마저 아까웠던 모양이다. 금융업을 완전히 장악한 미국계 은행이 여기에 수수료를 너무 많이 붙여서 미국에 호의 일색인 멕시코 통상 공무원들조차 골치를 썩고 있다.


국민의 사회적 권리를 포기할 것인가


이 정도면 민주주의는 백척간두에 걸리게 된다. 양극화, 즉 중산층의 소멸은 분명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 FTA는 초국적 기업의 이익을 위해 국민의 삶을 위협하고, 양극화의 나락으로 떨어진 국민들은 그 옛날 독재의 품을 그리워하는 퇴행 현상을 보이기도 한다. 멕시코의 한 공장 내부.(사진/ AFP)

 

개방·자유화의 마지막 단계인 FTA는 초국적 기업의 이익을 위해 일반 국민의 삶을 위협하고, 양극화로 나락에 떨어진 국민은 역설적으로 그 옛날 독재의 품을 그리워하는 퇴행을 보이기도 한다. 멀리 갈 것 없이 눈앞에 한미 FTA를 앞두고 지칠 대로 지친 우리 국민이 언뜻 내비치는 모습이기도 하다.


미국이 주도하는 FTA는, 국경에서 관세를 논하는 고전적 의미의 FTA가 아니라 국경 안으로 깊숙이 들어와 국민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놓는 경제 통합의 전 단계로 봐야 한다. 이를 냉혹한 현실로 보여주는 것이 NAFTA 제11장 투자 조항이다. 초국적 기업의 투자안전보장(expropriation)을 넘어 ‘이윤안전보장’으로 치닫는 항목으로 가득 찬 이 장의 백미는 제1131조 투자자의 정부 제소권이다. 모든 기업은 정부에 불만이 많다. 규제 때문에 사업을 못해먹겠다는 것이 어디 한두 번 듣는 소리인가? 다만 공공성을 위한 최소한의 규제라는 명분에 밀려 국내 기업은 벙어리 냉가슴 앓듯, 또는 기꺼이 그러한 투자 환경을 감수하지만 이제 초국적 기업은 그럴 필요가 없다. 신경독성물질의 수입 규제(에틸사 사례)나 유독물질 쓰레기처리장의 인·허가(메탈클래드 사례), 농업 관련 보조금(가미 사례), 심지어 도박산업에 대한 규제 등 모든 사회적 규제가 제소대상이다.

 

NATFA 이후 12년이 지난 지금 42건의 제소가 있었고 결론이 난 11건 중 5건은 기업이 이겨서 총 3500만달러의 벌금을 정부로부터 얻어냈다. 물론 국민이 낸 돈이다. 이 경우, 저 경우 제소를 하고 승소의 사례가 쌓이면 점점 더 범위가 넓어지고 건수도 많아질 것이다. 한 기업이 이기면 그것을 모범으로 삼아 유사한 소송이 줄을 이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판결을 내리는 곳은 유엔 산하의 법·제도위원회(UNcitral), 그리고 세계은행의 국제분쟁처리위원회(ISDIC)이다. 공익과 관련한 소송을 제3의 민간이 처리하는 것이다. 비밀주의로 악명 높은 이들 기관에 나라의 공공성이 목을 매게 된 것이다. 회심의 미소를 지은 다섯 기업이 모두 미국계이고 정부가 이긴 6건 중 절반은 미국이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제3의 민간기구들의 중립성을 의심하기에 너무 적은 수일까?

 

이는 국내법의 무력화일 뿐 아니라 국민의 사회적 권리를 보장하는 헌법을 위반하는 것이다. 예컨대 한-미 FTA가 맺어져 있었다면 론스타는 틀림없이 한국 정부를 제소했을 것이다. 이 엄청난 조항을 우리 통상교섭본부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심지어 이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을 통렬하게 논박하기까지 한다. 외국에 나간 우리 기업의 권리도 보장해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정말 그렇게 생각할까? 수시로 자의에 의해 반덤핑 제소를 해도, 아예 슈퍼 301조로 나라 전체를 문제 삼아도 그저 눈치만 보는 데 급급한 우리 정부가 한-미 FTA를 통해 이 대표적인 비관세장벽을 허문다면 그 말을 믿을 수 있다. 이 세상이 온통 비대칭의 관계, 쉽게 얘기해서 힘의 관계로 짜여 있다는 사실을 이들은 애써 무시한다. 아니 어쩌면 그것을 자연스러운 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디 투자 조항뿐이랴. 농업보조금도, 섬유산업의 원산지 규정도 모두 미국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비대칭 조항들이다.

 

민주주의는 권력이 한 곳으로 치우치는 것을 막는, 인류 최고의 발명품이다. 그 민주주의가 무너지고 있다. 엉뚱하게도 외부의 쇼크는 국내 개혁에 앞서 민주주의부터 직접 무너뜨릴 것이다. 시장의 이름으로 치장한 내외 거대자본의 독재는 실제의 정치에서도 저 삼각동맹(재벌-재경부 등 관료-보수언론)이 미는 정당의 집권을 가져올 가능성이 높다. 한-미 FTA는 그런 경향을 되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굳히려는 국제 공조인 셈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북구형 모델


브루킹스연구소의 임원혁 박사가 경쾌하게 묘사했듯이, 참여정부는 초기에 추구했던 스웨덴 모델을 버리고 멕시코 모델을 택했다. 청와대와 관계 부처는 지금 멕시코를 미화하기 바쁘다. 과연 그렇게 좋은 모델인가.

 

내 설명은 ‘왜곡과 과장’(<한국경제> 5월24일치)으로 가득 차 있다고 주장할 테니 습기라곤 하나 없는 통계를 들여다보자. 첫 번째 그림은 현재 세계화의 이념적 지표인, 멕시코의 고위관료와 한국의 고위관료가 똑같이 되뇌는 워싱턴 컨세서스(개방, 민영화, 금융긴축) 이전과 이후, 아메리카 나라들의 성장률을 비교하고 있다. 중남미가 외환위기를 거쳐 개방·자유화라는 워싱턴 컨센서스를 받아들인 것은 1980년대 초·중반, 그리고 NAFTA로 대표되는 FTA 열풍은 그 기조의 정점이다.

꼭 워싱턴 컨센서스 때문이라고 볼 수 없을지라도 칠레를 제외한 모든 나라의 성장률이 떨어졌다. 다음 그림은 대표적인 불평등 지표인 지니계수의 추이이다.

 

이번에는 브라질을 빼곤 모두 악화됐음을 알 수 있다. 흥미롭게도 선진국인 미국의 양극화는 다른 중남미 국가들을 추월하는 모범을 보이고 있다. 성장률은 떨어지고 국내의 불평등도는 높아지는 아메리카 모델을 왜 정부는 애써 따르려는 것일까? 과연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의 주장대로 이미 수명을 다한 일본형 또는 동아시아형 모델을 버리고,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아메리카형을 따라야 할까? 미국이 NAFTA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판박아놓은 멕시코 모델을 따르면 뭐가 좋아진다는 것일까? 마지막 그림을 보자. 김 본부장에 따르면 마지막 가쁜 숨을 몰아쉬어야 할 동아시아는 여전히 승승장구하고 있다. 아메리카 대륙과의 격차는 좀처럼 좁혀질 것 같지 않다. 물론 나는 동아시아 모델이 한계를 노정하고 있다는 말에 찬성한다. 특히 우리나라에 국내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도 내가 앞장서 주장하겠다. 그러나 그 개혁이 과연 아메리카형을 본받아야 하는 것인지 아닌지는 이렇게 쉽게 눈으로 확인된다. 한-미 FTA는 국민을 사지로 몰아넣고 민주주의를 질식시키는 길로 들어가는 입구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회적 대타협과 이중 삼중의 사회적 안전망으로 무장돼 있는, 이를테면 북구형 모델이지 미국형의 황량한 정글이 아니다. 참여 민주주의를 내걸어 국민의 지지를 받은 정부가 이제 참여는커녕 민주주의마저 내던지려 하고 있다.


비판 돌리려 다른 FTA를 추진한다면?


마지막으로 참여민주주의 이전에 절차 민주주의에 대해서 한마디 덧붙인다. 나는 한-미 FTA가 비밀리에 졸속으로 추진되고 있다는 점, 공개만이 살길이라는 점을 누누이 밝혔다. 불행하게도 정부는 마지못해 거의 정보가치가 없는 자료만 공개하고 덧없는 이데올로기 공세를 취하고 있다. 이 문제는 더 이상 거론하지 않겠다. 그러나 만일 한-미 FTA에 대한 비판을 분산시키려고 한-일 FTA 협상을 재개하고 나아가서 유럽연합(EU)과 새로운 FTA를 추진한다면 그야말로 악수가 악수를 낳는 꼴이며 그 후유증은 현 정부의 평가를 끝없는 심연으로 떨어뜨릴 것이다. 아니 국민을 최악의 늪에 빠뜨리는 일이다. ‘참여’와 ‘졸속’은 상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