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희|건국대 교수·법학
[기고] 독선과 맹목의 결정체 ‘한·EU FTA’
2011-04-17
한·유럽연합(EU) 자유무역협정(FTA)의 비준에 목을 매는 나라, 그것이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그 내용이 어떻고 그 효과가 무엇이며, 그것을 만든 절차가 어찌되었는지는 안중에도 없다. 그냥 시한만 정해두고 밀어붙이기식으로 통과시키는 것에만 전력을 다한다. 서민들이야 죽건 살건, 헌법이야 있건 없건 눈 하나 깜박하지 않고 통상관료들의 독선과 여당의원들의 맹목으로 한·EU FTA의 국회 비준동의 절차는 목하 진행되고 있다.
한·EU FTA로 인한 경제효과가 얼마니 하는 새빨간 장밋빛 전망들은 숫자놀음이라는 점에서 그나마 나은 편이다. 답답하고 속 터지는 문제들은 칼날 같은 시장경쟁으로부터 애당초 도태되도록 운명지워진 우리들에게 집중된다. 한·EU FTA로 인한 의약품 가격과 의료비의 인상은 서민경제를 궁핍하게 하며, 경제성장을 주도한다고 알려진 대기업의 영업이익은 바지락이나 어묵류 등을 수출하지 못하게 되는 대표적인 중소기업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다. 친환경 학교급식은 그들의 공격대상으로 방치한 반면, 한삼모시·안동포·함평한우 같은 우리의 지명을 이용한 특산물의 명칭은 그들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게끔 했다. 아직도 골목가게들이 피나는 투쟁을 벌이고 있는 기업형 슈퍼마켓(SSM)조차도 이제 통상 자유화라는 이름으로 온전히 내줘야 하지만, 지역경제의 활성화를 위해 민자사업을 지역업자와 같이 하도록 한 특례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된다. 사정이 그럼에도 이 FTA는 어떠한 검증절차도 거치지 않는다. 행정부 내부에서조차 통상교섭본부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이 FTA를 제대로 읽어봤다는 증빙이 보이지 않는다. 그 수많은 번역 오류들이 내부적으로 전혀 걸러지지 않았음은 이를 뒷받침한다. 대통령이나 총리, 관련부처의 장관이나 차관들이 이 FTA를 결재하면서 영문본을 읽고 정책 판단을 했다면 몰라도 말이다.
국회는 아예 모르쇠로 일관한다. 모든 국민의 생업과 일상이 달려 있음에도 정작 국민을 대표해야 할 국회조차도 이들의 권력 앞에서는 무력하기 짝이 없다. 내용의 검토는 아예 포기한 채 주어진 일정표만 고집하는 외통위는 물론, 이 FTA에 대한 의견조회를 받고도 아예 안건 상정조차 하지 않고 있는 법사위 등 9개 상임위원회까지 총체적으로, 전면적으로 대한민국 국회는 직무유기에 빠져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에 그치지 않는다. 이 FTA가 설치하는 무역위원회는 헌법으로 정한 국회의 입법권조차도 넘어서는 결정권을 가진다. FTA에 관한 한 무역위원회를 구성하는 통상교섭본부가 초헌법적 권한을 가지는 셈이다. 게다가 이 FTA로 인해 국회가 반드시 고쳐야 하는 법률만 공식적으로는 14개, 비공식적으로는 23개가 넘는다. 국회가 어떤 일이 있어도 결코 제·개정할 수 없는 법률은 아예 보고조차 되어 있지 않다. 국민을 대표하는 대한민국 국회의 권한과 권위는 무시되는 차원을 넘어 아예 부정되고 있다.
그래서 한·EU FTA에서 주어의 격을 가진 자는 오로지 통상본부뿐이다. 그 관료들만이 스스로 제안하고, 협상하고, 평가하고, 판단한다. 국민주권의 헌법 이념에 어울리는 대중의 의견이나 이해관계도, 국정을 통할하는 대통령과 총리의 헌법적 책임도, 자유민주주의가 요구하는 민주적 절차도 없이 오로지 그들의 결정만이 횡행할 따름이다. 그리고 이 와중에 통상관료의 독재는 점점 전면으로 나선다. 바야흐로 이 FTA의 비준에만 목을 매는 사이에 대한민국은 조금씩 조금씩 또 다른 독재국가의 길로 접어들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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